수갑과 쇠사슬 찬 근로자들[근로자 A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근로자 A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7일간 구금된 근로자들에게 '인권'은 실종된 단어였습니다.

연합뉴스가 14일 공개한 한 근로자 A씨의 '구금일지'에는 참혹했던 당시 구금시설 환경과 인권 침해 상황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습니다.

A씨는 합법적인 B1 비자(출장 등에 활용되는 단기 상용 비자)로 입국습니다. 두 달간 업무 미팅 및 교육을 위한 출장 도중 케이블타이에 손목이 묶인 채 체포됐습니다.

◇ 설명도 없이 체포영장 서류 작성…미란다 원칙 고지도 없어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은 4일 오전 10시쯤 들이닥쳤고 그들은 안전모와 안전화를 착용한 근로자들을 1차로 몸수색했습니다. A씨는 신분증과 여권도 못 챙겼습니다.

ICE 요원들은 오후 1시 20분 외국인 체포 영장(warrant arrest for alien) 관련 서류를 나눠주며 빈칸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류에 대한 설명도, '미란다 원칙' 고지도 없었고 고압적 분위기 탓에 한줄 한줄 영어를 해석해가며 서류를 작성할 분위기도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A씨는 "근로자들은 이 종이를 작성하면 풀려나는 줄 알고 종이를 제출했다"며 서류 제출 후 손목에는 빨간 팔찌를 채웠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요원들은 서류를 제출한 근로자들의 짐을 뺏기 시작했다. 양파망 같이 생긴 가방에 휴대전화 등 짐을 넣으라고 강요했습니다.

심각한 분위기를 눈치챈 A씨는 짐 가방 사이에 있던 휴대전화를 몰래 켠 뒤 가족과 회사에 '연락이 안 될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껐습니다.

A씨는 9시간 넘게 대기하다 손목에 케이블타이가 바짝 채워진 채 호송차에 탑승했다. 먼저 간 사람들은 쇠사슬로 허리, 다리, 손목까지 채워진 채 이동했습니다.

호송차 내부에는 변기가 있었고 지린내가 진동했고 에어컨도 켜주지 않았습니다.

◇ 구금 초반 72인실 몰아넣어…"곰팡이 핀 침대, 물에선 냄새 나"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근로자들은 구금 초반에 72인실 임시 시설에 몰아넣어졌습니다. 1번부터 5번 방까지 있었고 구금자들은 방을 옮겨 다녔습니다.

늘어선 이층 침대와 함께 공용으로 쓰는 변기 4개, 소변기 2개가 있었고 시계도 없고 바깥도 볼 수 없었습니다. 침대 매트에는 곰팡이가 펴있었습니다.

발 디딜 틈 없는 공간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변기 옆에는 겨우 하체를 덮는 천만 있었고 A씨는 생리 현상을 참으며 버텼습니다.

A씨는 "생필품, 수건도 지급 못 받은 채 잠이 들었다"며 "지인이 수건을 하나 줘서 수건을 덮고 잠이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임시 공간이 너무 추워 근로자들은 수건을 몸에 두르고 있었으며 일부는 전자레인지에 수건을 돌려 몸을 녹였습니다. 제공된 물에서는 냄새가 났다고 했습니다.

이후에는 치약, 칫솔, 담요, 데오드란트 등이 제공됐습니다.

A씨는 4일차에 입소 절차가 끝난 뒤 2인 1실 방을 배정받았고 구금자 규모가 워낙 커 관련 절차가 늦어진 경우에는 72인실에만 머문 사람도 있었습니다.

펜과 종이는 제공되지 않았다. A씨는 구금 4일차 서류 작성을 하던 때 몰래 종이와 펜을 챙겨 구금 일지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 "나는 B-1인데 왜 잡힌건가" 묻자 요원들 "나도 모른다"

겨우 버텨가던 구금 3일차 6일. 비로소 ICE의 인터뷰가 시작됐습니다.

먼저 ICE 요원들은 '자발적 출국 서류'를 나눠준 뒤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상당수 구금자는 '불법'이란 단어로 채워진 서류에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일단 서명했습니다.

오랜 시간 대기하던 A씨는 3일 만에 처음으로 바깥 공기를 마시면서 인터뷰 장소로 이동했고 양손 지문을 찍은 뒤 ICE 요원 2명이 A씨 서류를 살펴봤습니다.

이들의 첫 질문은 '무슨 일을 했느냐'였습니다. A씨는 업무 미팅 및 교육을 위한 출장을 왔다고 답변했습니다.

이후 별다른 질문이 없던 요원은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남한)인지를 물었고 A씨는 맞는다고 답변했습니다.

이를 들은 직원들은 웃는 표정으로 대화하며 '노스 코리아'(North Korea·북한), '로켓맨'(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에 붙인 별명) 등을 언급했습니다.

A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나를 가지고 농담·장난을 하는 것 같아 열 받았지만, 혹여나 서류에서 무엇인가 잘못될까 봐 참았다"고 일지에 기록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A씨는 "나는 적법한 B-1 절차로 들어왔고 그 목적에 맞는 행위를 했는데 왜 잡혀 온 것이냐"고 물었고 그러자 "나도 모르겠고 위에 사람들은 불법이라고 생각한다"는 요원의 답변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일부 요원들은 다른 구금자에게 ICE의 잘못을 인정하는 발언도 했습니다.

◇ 총영사관측 "무조건 사인하라…분쟁하면 못나가"

구금 4일차인 7일. 총영사관 및 외교부 직원 4명이 구금자들을 만났습니다.

총영사관 측에서는 "다들 집에 먼저 돌아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여기서 사인하라는 것에 무조건 사인하라"고 말했다고 A씨는 전했습니다.

또 분쟁이 생기면 최소 4개월에서 수년간 구금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아울러 사인하면 강제 출국당해 비자는 취소되고, 전세기를 통해 고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는 사실을 안내했다고 합니다.

A씨는 그날 밤 11시쯤 4일 만에 정식 입소 절차를 밟았고 죄수복으로 처음 옷을 갈아입고 키, 몸무게, 혈압 등 메디컬 체크를 받았습니다.

새벽 3시쯤 A씨는 2인 1실 방을 배정받았다. 해당 건물은 방이 50개가 있었고 방마다 변기와 책상 2층 침대가 있었습니다.

5일차인 8일에도 외교부 직원들이 구금자들을 만났습니다.

A씨는 "B-1 비자로 들어온 게 왜 불법인지에 대해 파악이 안 된 것 같아 화가 났다"며 "자발적 출국 서류에 사인한 후에 우리를 무조건 보내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느껴져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고 적었습니다.

그 뒤로는 별다른 정보 없이 대기가 이어졌다. 언제 나갈지 말이 없고 예정보다 석방이 미뤄지며 구금자들의 신경은 한껏 곤두선 상태였습니다.

결국 근로자들은 11일 새벽 1시께부터 애틀랜타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지옥 같던 구금 시설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근로자 330명(한국인 316명·외국인 14명)은 대한항공 전세기 KE9036편을 타고 한국 시간으로 오후 3시 30분께 고국 땅을 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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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sorimo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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